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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명] 無限抱擁
[작품명] 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
[장 르] TV 이미지송
[가 수] 高橋洋子

はなびらが

かぜに ゆれて おちるように

いのちは ただ はたなくて ああ

だいちへと きえてゆく

かなしみは

どぎれた みらいではなく

おもいでの こばこの スミに

わすれて ゆかれる こと

あいされたい いま いじょうに

ふかく つよく もとめあい

その こころに その ひとみに

わたしがいた しるしを のこして

たいようが

ちへいせんに とける ように

さいごまで きれいなまま ああ

わたしを うつしてたい

あたたかな

うでの なかに ねむってる

えいえんを てにいれたくて

おんなは まものに なる

あいされたい いま たしかな

きもちだけを わかちあい

この すはだを この といきを

むげんに たいていてね おねがい

しあわせの かたちは

いつでも みえないから

いたいくらい もっと あなたに

あいされたい いまいじょうに

ふかく つよく もとめあい

その こころに その ひとみに

わたしがいた しるしを のこして
2006/01/24 19:15 2006/01/2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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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 나이에 그정도 액수의 돈을 수중에 가진 사람 별로 없다"

5개월넘짓 계속해 온 일을 끝마친 나에게 사장님이 하신 말씀.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돈을 많이 버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세상에 그렇게 벌어놓고 관심이 없을 수가 있냐고 말하신다면 할 말 없지만 이것은 필요최소요구에 의한 행위로, 아무렇게나 써 없애는 '용돈'으로서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돈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면 부자가 되는 법을 설명해 놓은 책들도 많고 수많은 데이터와 미래예측에서 나온 결과로 돈버는 방법을 기술한 사이트도 많고 이렇게이렇게 하면 돈을 번다고 주구장창 썰을 풀어놓은 사람도 많고 하여튼 세상 모든 인구가 도데체 돈을 버는데에만 미쳐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 돈은 현대 문명사회의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요소이며 서비스를 많이 구입 할 수록 나의 생활은 편리해지고 더욱 수준 높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인생은 그리 편리할 필요도 없고 수준 높을 필요도 없다. 필요최소요구라고 말하고는 필요최소가 충족되면 더 높은 필요최소가 생기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긴 하지만 나의 필요최소는 정말 낮은 수준의 것이다. 지금 다니는 학교를 졸업하는 것. 그 이외의 다른 것은 필요없을뿐. 좋은 컴퓨터도, 좋은 차도, 좋은 집도, 좋은 서비스도.

그렇게 기를 쓰고 악다구니처럼 돈을 벌어야 한다면, 글쎄, 굳이 없어도 상관없다. 없어도 상관없고 정 필요하다면 돈없이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다 없으면 말면 된다. 굳이 나의 소중한 영혼을 깎아먹어가면서 돈을 벌어 그런 필요최소요구 - 사실은 전혀 필요'최소'도 아닌 - 를 채워야 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도 않는다.


내가 번 돈은 사실 그리 큰 액수도 아니다. 여기서 랭귀지스쿨 학비대고 집값내고 한국에 돌아가서 빌어먹을 성균관대학교 2년 등록금 대면 끝이다. 사실 요걸로도 모자란다.


차라리 나는 돈을 버는 것보다는 잃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다. 적극적인 오펜스보다 확실한 수비쪽이라고나 할까.
얼마전에 외화정기예금쪽을 알아본 것도 자산을 불린다기 보다는 벌어놓은 돈을 환율하락으로 까먹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다 나온 결과로, 자산을 불리고 싶었으면 펀드에 가입을 하거나 아니면 카지노에 갔겠지. 사실 카지노는 돈을 '잃는' 곳이긴 하지만 말야(웃음)


우리가게 사장님은 부자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그런 '부자' 말이다. 아들에게 '그깟 페라리 사주면 그만' 이라고 하는 대사도 황당하고 돌릴 수 있는 자금이 몇백만불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더 돈을 벌려고 또 엄청 커다란 프로젝트를 작성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옆에서 보면 '저렇게 살아서 돈 많아봤자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면서 파김치가 된 몰골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며 멈추지도 못하고 달려가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공격자제, 철벽수비'라는 건 사실 돈에 국한 된 것이 아닌,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개념중 하나이다. 내 모든 언동과 행위는 저 사상에 부분적으로 종속되며 그것은 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내 인생엔 돈이 별로 필요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돈을 벌어 뭘 사야지 뭘 사야지 하는 생각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돈을 버는 수많은 방법이 꼴사납게 여겨진다.


사실 '잃지 않는 것' 이라는 말에서 마저도 꿈틀거리는 검은욕심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돈을 버는것' 만큼 궁극적인 욕심의 끝을 나타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말 자체에서 느껴지는 다크포-스는 날 너무 어지럽게 만들고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저 다크포스에 휘감겨 앞도 보지 못하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취하지 않는 것'
나는 과연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되면 나는 아마 지리산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마지않아 주시긴 하지만(웃음)
2006/01/24 05:59 2006/01/24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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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 문득 휴대폰 속의 '통화기록' 메뉴를 꾹 하고 눌러본다.

"총 통화시간
168시간 22분 09초"

내가 휴대폰을 구입한지 벌써 일년하고도 4개월여 되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의 그 깨끗했던 몰골과 데이터베이스가 지금은 잃어버려도 다시 그 자리에 가면 그냥 있을것같은 고물적 몰골과 백여개가 넘는 전화번호들과 지인들에게서 온 문자메시지, 심심할 때 가끔 했던 게임들의 하이스코어 같은 것들로 빼곡이 채워져있다.

휴대폰이란 뭘까... 携. 帶. 들고다닐 수 있는 전화기?

나는 휴대폰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의 연결이 가능한 도구라 정의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용무를 가진 개인과 개인간의 direct한 연결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기존 집전화를 생각해보면 일단 전화를 걸었을 때 의도한 상대방이 받을 지 알 수 없고 아예 상대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파악이 불가능하다. 내가 휴대폰에 있어 칭찬하고 싶은 점은 이런 특정상대의 연락용 스테이션(그 전화가 커버할 수 있는 영역범위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듯 싶다)에서의 부재여부와 통화가능 여부의 한계점을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행동특성에 비추어 볼 때 획기적인 장점이 아닐 수 없는데 일단 특정상대와의 통화에서 다른 상대가 나올 가능성의 0점수렴에서 오는 거부감의 해소와 명확하지 못한 불특정 '영역'. 즉 스테이션으로의 연계가 아닌 '점'으로의 연계에서 오는 직접접속성공률의 비약적 향상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용무를 가진 사람끼리만의 serially한 접속성공률의 대폭상승을 구현하게 하는 그것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휴대성만을 따지고 싶다면 주파수대역을 무한으로 높인 무선전화를 예로 들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휴대폰의 첫 번째 장점은 그런 것이다. 마킹으로 인한 단일 개인의 스테이션화.

휴대폰에는 Short Message Service, SMS라고 해서 우리말로는 단문전송서비스라는 기능이 있다. 이것은 약 80byte의 짧은 메시지를 특정인에게 보내는 기능인데, 이것이 내가 휴대폰의 두 번째 획기적 장점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질구레한 면에서 생각해보면 10초에 30원하는 통화료보다 40글자를 전송하는데 드는 30원의 가치가 더 높다. 는 면도 있긴 한데... 일단 SMS는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통화의 경우 순간적인 센스와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에 충실하기가 힘들고 필요외 요소인 침묵상태까지 요금정산에 포함되는 반면 SMS는 수신메시지에 대한 순간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형식이 아니기에 '충분히 생각해서 답변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정할 수 있다' 게다가 침묵상태가 요금정산에 포함되지 않는다.(이것은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SMS의 또 한가지 장점은 '틀'을 가진다는 것이다. 틀이라고 하면 한계, 획일성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 틀이라는 것은 잘 활용하면 무한정 하게 넓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의의를 두고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일단 SMS의 틀이라고 하면 80byte의 제한된 용량과 지정된 '문자'의 사용, 그리고 줄 간격 정도로 규정 할 수 있겠는데, 제한된 용량은 생각을 압축하여야하는 동기가 되고 이는 생각의 재구성을 요구하며 결국 '두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아니라고? 재고찰이라는 것은 반드시 거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 것은 아닐까'를 두 글자로 줄이기 위한 노력마저도 재고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자의 사용은 발성의 보충을 가져온다. +가 있으면 -도 있는 법이지만 +만 생각해보자. 말로는 하기 힘든 대사가 있다. 문자로 바꾸면 보다 수월한 process가 가능하다. 어째서일까. 각자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중의 멋진 특징으로는 이모티콘이 있을 수 있다. 발성의 억양이 문자의 이모티콘으로 전환된 것이라는 판단도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씀으로 인해 풍성해지는 문자속 감성의 정도는 가히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라 생각한다. 실질적 대화상에서 ♡라든지 ♪를 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줄 간격은 그 여백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음 내용으로의 전환 사이에 자리잡은 하얀 여백의 뒤에 나타나는 것은 내용의 연속일 수도 있지만 어이없는 반전일 수도 있다. 상상의 가능성을 부풀려준다고 할 수 있다.
또 SMS는 시간의 공간적 이용을 가능케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에 대해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feedback을 요구한다. 통화의 경우,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찾아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경우보다 우선 전화를 끊고 책을 찾아 다시 연락을 해 주는 형식을 취할 텐데 이 상황에서 통화가 끊긴 순간 접속시간의 단위가 한번 끊긴 것이고 이것은 일단 시간이라는 공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는 [연락-책찾기-피드백]이라는 하나의 Track이 각 통화라는 수 개의 Session으로 분할되어 운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SMS를 이용한다면 [연락-책찾기-피드백]이 한 세션 내에서 문자가 오고가 opening에서 closing이 완전히 이루어지는데 결국 세션이 트랙의 크기에 맞게 유동적으로 늘었다 줄었다하는 공간적 활용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휴대폰을 내가 어렵게 대하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의무'이다.
기본적으로 스테이션에서의 개인은 전화가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지만(왜냐하면 상대방은 '결과적으로' 그 '영역'에 접속을 시도한 것이지 자신이 원하는 개인에 접속을 시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대폰이라는 자신에의 직접접속수단을 가지게 된 지금에 와서는 상대방의 연락을 받지 않을 경우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고 너의 접속요청에 응하겠다' 라는 의무감을 동반하는데 나는 이 의무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는 만큼 의무는 가중되고 그 만큼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비난받게 될 소지(=확률)도 높아간다.
간단히 말해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만큼 전화를 못 받게 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 약속이라는 것은 상당히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 '연락을 받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확률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무얼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잡상이라는 것은 어디로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구질구질하다. 몇 군데 논리의 오류가 보이는 것이 불쾌하다. 잡상이라는 이유로 넘어가보자.
2006/01/08 19:34 2006/01/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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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잡다한정보

만기지급식 이율 (2005년 12월 기준)


...뉴질랜드달러는 6개월 이자가 무려 7.6%!!

만약 호주달러환율이 계속 이렇게 약세로 나간다면 돌아갈때 달러를 죄다 뉴질랜드 달러로 바꾸는 수밖에 방법없군-_-;;
2006/01/01 18:29 2006/01/0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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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d under 잡담
일기를 쓰기 시작하게되면서부터 나는 매 해의 말일마다 지난 일년동안 있었던 일들을 한 달 단위로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사실 '제대로' 일기에 생활을 기록하기 시작한 게 대학 들어가고부터니까 2001년부터 무려 5년째 이런 웃기지도 않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은 특이하게도 그 작업을 하지 않았다. 매년 몇시간이고 일기장을 붙들고 씨름하다보니 '도데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도 있었고 2005년 12월31일 오후 10시까지 일하고 바로 시드니 시티에 있는 사장님 집에 가서 랍스타좀 뜯어먹다 나가서 불꽃놀이 보고 새벽 한시에 스트라스필드 나가서 팥빙수 먹고 들어와 한 다섯시간 자고 또 일하러 나가는 몰상식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도 있고 나의 2005년이 단 두 단어로 뭉뚱그려질 수 있기 때문도 있다.

나의 2005년은 '군복무'와 '일' 두 단어로 압축된다. 보통은 1월엔 무슨일이 있었고 2월에는 무슨무슨 사건이 있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같은 잡다구레한 잡상을 나열하곤 했는데 작년은 정말 그런 감상자체도 거의 없었거니와 감상을 갖게하는 일도 없었고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들 뿐으로, 반년은 군대에서 반년은 식품점에서 지냈다. 한마디로 2005년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라고는 말해도 그렇게는 안되지. 일기장에까진 안쓰더라도 어쨌든 정리는 해야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어쨌든 몸으로 체득해 뇌에 남은 기억이 사라질리도 없는 일이다. 완벽히 잊을 수 없다면 희부옇게 남겨두고 싶지도 않다.


군대에서는 정말 즐거운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후임들과 장난치고 농을 던지면서 말초적인 흥을 일으키긴 했지만 정말 '즐겁다' 고 생각한 적이 없다. 분대장 달고는 무거워진 어깨에 휘청거리며 겨우겨우 3개월을 보내고 왕고 되서는 한없이 침잠해가는 자아를 수복하기 위해 한다는 게 고작 나스 키노코씨와 만나는 것 - 나스가 문제라기 보다는 제한된 그 한가지 행위가 고작이었다는 사실이 문제였지만 - 이었고.
사고치고 제대하고 한달 깨작거리다 호주가서는 정말 인간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식품점에서 하루 생활을 한 나. 어쨌든 일과 생활이 구분되는 나로서는 식품점에서 '생활'을 할 수는 없었고 그 괴리감에서 나오는 스트레스는 나를 킹스캐니언 절벽으로 몰아넣는 프레셔가 되어 주셨지.


하고싶은 일을 하기위해서는 해야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해하고 있고 인정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해야하는 일을 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다른사람과 비교해서. 가 아니라 그냥 내 기준에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기위해 해야되는 일을 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30분 이후에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2시간 이상 해야되는 현실에 처한 내 처지가 가끔은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환경탓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해야되는 일을 하지 않고도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접할 때 나는 어떤 기분에 빠지는가 -


어쨌든 working은 끝나간다. 이젠 holiday가 남았을 뿐이다. 2006년은 개의 해이고 나는 개띠이며 사실 그딴건 별 상관도 없지만 그래도 좋게 볼려면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는 여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냥 예감으로도 내 2006년은 잘 될 것 같다.

나는 내 미래에 대해 어떤 걱정도, 근심도 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믿고 있으며 믿는 마음은 힘이되어 마법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최강마법 메테오로 변한 나의 신념은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에 메테오스트라이크를 연속발동으로 날려줄 것임을 전혀 의심도 하지 않는다.


전체 시간을 연속된 무한개의 term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나에게 있어 인간들이 정해놓은 '시간의 경계'라는 것은 어떤 의미도 갖지 않지만 그래도 작별인사는 해 둘 필요가 있겠지.

사요나라 2005, 웰컴 투 마이 하우스 2006.
2006/01/01 16:28 2006/01/01 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