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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읽다가 E.H 카 선생이 생각나서 뒤적거려봤더니 이런게 나오더라.. 나도 역사학도였긴 했군;;

요즘 신학기고 하니 역사란 무엇인가 리포트를 써오라는 요구가 많을 것 같다. 옛날에 썼던 글인데 지금 읽어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아 올려본다. 아무렇게나 재단해서 써도 상관없다. 이걸 제출했더니 D를 주더라 하는 리플도 환영. 근데 책 자체 리포트는 아니라서 좀 바꿔야 할 듯...



카아가 가진 현재주의의 실체

카아는 ‘역사는 무엇인가’ 라는 책 전체에서 ‘과거가 역사가에 의해 해석되었을 때에야말로 그것은 비로소 역사가 된다’는 논지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제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말미에서는 카아 자신의 주장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문장으로 단원을 맺는 노련함을 보여준다. 카아의 이런 주장은 너무나도 현재주의자들의 주장과 비슷하여 카아가 현재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카아는 현재주의자가 아니다. 그 이유를 짚어보기로 하겠다.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언급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카아는 ‘역사’라는 단어를 사회 안에 있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연구과정이라는 뜻으로만 한정시켜 사용하고 있으며 사실(fact)로서의 역사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상당한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장이나 여기서는 카아가 선택한 역사라는 낱말의 정의를 그대로 차용하기로 한다.

기본적으로 현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역사라는 것은 역사가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fact)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조리한 것이다. 거기에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으며 똑같은 사실을 여러 가지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위험성도 있으나 그것 또한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현재론자들의 논지이다. 카아는 1장 맨 마지막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부분에서 그런 논지를 뒷받침 하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카아는 그런 주장을 한 단계 넘어서서 그렇게 ‘해석된 역사’에는 등급이 존재하여 모든 해석된 역사들은 아래서부터 위까지 순위를 매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아에 의하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역사가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자전거를 타거나 차를 타고 30분 전에 학교 건물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역사가 될 수 없고 카이사르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역사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이 모든 사실들이 역사가에 의해 해석된다 할지라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만이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다룬 역사가는 권위를 가졌고 여러 가지 사료를 참조했으며 그가 가진 논리체계도 상당히 성숙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주의의 관점으로 해석된 역사들 사이에 우열은 존재할 수 없다. 역사는 그저 효용을 가진 역사로 존재 할 뿐이지 그 효용의 정도(程度)를 평가할 수 있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카아의 엘리트 역사주의를 보게 된다.
두 번째로 객관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근본적인 객관성의 존립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현재주의의 주장에 반해 카아는 변형된 형식의 객관성을 인정하고 도입하려 한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사이에 객관성은 있을 수도 있으며 가장 단순한 종류의 역사적 진술만은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혹은 절대적으로 오류라 판단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이 확립된 이후에라면 그것은 의미와 객관성을 가지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단 가장 단순한 종류의 역사적 진술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진술의 객관을 판단한 척도는 도대체 어디서 조달해 온 것인지 묻고 싶다.
객관성이든 주관성이든 그것을 주장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걸 다른 것과 비교해보고 납득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 두 행위에는 모두 절대의 수준으로 기능하는 잣대가 필요하고 어쨌든 간에 카아는 그것이 제공 가능할 것이라 장담하고 있으나 카아 자신이 제시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정답에 의하면 잣대의 제공은 불가능하다. 카아는 해석의 상대적 성질을 강조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주장에서 객관성이라는 커다란 무기가 사라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성립이 되기 힘든 객관성을 우겨넣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카아의 자신에 가득찬 엘리트 역사주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카아는 책 전체를 통틀어 역사가의 역할을 한껏 강조하다 못해 역사가의 손을 마이더스의 손으로 만들어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고 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 역사가 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이유는 역사가들이 그것을 주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고 모든 사실(fact)은 역사가가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해독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거나 자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된 역사야말로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켜준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가가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서만 역사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다지도 역사가의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역사가와 사실 간의 관계를 요리사와 요리재료의 관계로 환원시키는 카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매 단원마다 역사가와 사실의 평등하고도 대등한 관계를 주장한다. 역사가는 그의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며 역사란 오늘과 어제라는 대등한 주체들 간의 대화라는 주장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나 요리사와 요리재로는 하늘이 뒤집어져도 결코 대등하거나 평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 요리재료는 요리사에 복종할 뿐이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 없다. 수동적으로 요리당하고 소비자에 의해 먹히는 것이 그 요리의 최후일 뿐이다. 카아는 이 둘 간의 지배구조, 혹은 권력관계의 출현을 매 단원마다 진화하고 있으나 역시 그의 엘리트 역사주의는 숨길 수 없는 형체화된 실체로 드러나고 있다.

카아는 현재주의자들의 인식론은 차용하고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현재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그는 엘리트주의에 의해 해석된 역사를 도구로 하여 진보를 얻어내고 결국에는 사상의 지평선을 확대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사실(fact)은 역사가의 원료라고 저평가하고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지식수준을 기반으로 한 역사는 무시하며 역으로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독단적인 엘리트 역사주의에만 기반을 둔 그의 주장이 과연 진보를 획득하고 사상의 지평선을 확대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좀 더 많은 관용이 필요하다고 본다. 역사는 그 스스로 존재하고 있으며 외부작용자에 의해 어떤 모습으로도 존재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과 본좌급 교수 김택현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역사란 무엇인가. 사실 이 책 읽는건 이제 때려치울때도 됐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케이스 젠킨스 지음, 최용찬 옮김
포스트모던 시대에 학자들은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최근의 사조에 동조하든 거부하든 간에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간략한 논의.-조선일보

  역사란 무엇인가 -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한 사회의 생존을 내세운 강렬한 이념앞에서는 윤리적 당위나 학문적 객관성도 뒤로 밀려나는 현실,그리고 이 현실에 불만을 품는 젊은 세대.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바로 이런 70, 80년대 한국 시대 상황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2009/03/14 00:19 2009/03/14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