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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7] 휴대폰에 대한 잡상

문득 휴대폰 속의 '통화기록' 메뉴를 꾹 하고 눌러본다.

"총 통화시간
168시간 22분 09초"

내가 휴대폰을 구입한지 벌써 일년하고도 4개월여 되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의 그 깨끗했던 몰골과 데이터베이스가 지금은 잃어버려도 다시 그 자리에 가면 그냥 있을것같은 고물적 몰골과 백여개가 넘는 전화번호들과 지인들에게서 온 문자메시지, 심심할 때 가끔 했던 게임들의 하이스코어 같은 것들로 빼곡이 채워져있다.

휴대폰이란 뭘까... 携. 帶. 들고다닐 수 있는 전화기?

나는 휴대폰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의 연결이 가능한 도구라 정의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용무를 가진 개인과 개인간의 direct한 연결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기존 집전화를 생각해보면 일단 전화를 걸었을 때 의도한 상대방이 받을 지 알 수 없고 아예 상대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파악이 불가능하다. 내가 휴대폰에 있어 칭찬하고 싶은 점은 이런 특정상대의 연락용 스테이션(그 전화가 커버할 수 있는 영역범위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듯 싶다)에서의 부재여부와 통화가능 여부의 한계점을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행동특성에 비추어 볼 때 획기적인 장점이 아닐 수 없는데 일단 특정상대와의 통화에서 다른 상대가 나올 가능성의 0점수렴에서 오는 거부감의 해소와 명확하지 못한 불특정 '영역'. 즉 스테이션으로의 연계가 아닌 '점'으로의 연계에서 오는 직접접속성공률의 비약적 향상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용무를 가진 사람끼리만의 serially한 접속성공률의 대폭상승을 구현하게 하는 그것이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휴대성만을 따지고 싶다면 주파수대역을 무한으로 높인 무선전화를 예로 들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휴대폰의 첫 번째 장점은 그런 것이다. 마킹으로 인한 단일 개인의 스테이션화.

휴대폰에는 Short Message Service, SMS라고 해서 우리말로는 단문전송서비스라는 기능이 있다. 이것은 약 80byte의 짧은 메시지를 특정인에게 보내는 기능인데, 이것이 내가 휴대폰의 두 번째 획기적 장점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질구레한 면에서 생각해보면 10초에 30원하는 통화료보다 40글자를 전송하는데 드는 30원의 가치가 더 높다. 는 면도 있긴 한데... 일단 SMS는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통화의 경우 순간적인 센스와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에 충실하기가 힘들고 필요외 요소인 침묵상태까지 요금정산에 포함되는 반면 SMS는 수신메시지에 대한 순간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형식이 아니기에 '충분히 생각해서 답변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정할 수 있다' 게다가 침묵상태가 요금정산에 포함되지 않는다.(이것은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SMS의 또 한가지 장점은 '틀'을 가진다는 것이다. 틀이라고 하면 한계, 획일성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 틀이라는 것은 잘 활용하면 무한정 하게 넓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의의를 두고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일단 SMS의 틀이라고 하면 80byte의 제한된 용량과 지정된 '문자'의 사용, 그리고 줄 간격 정도로 규정 할 수 있겠는데, 제한된 용량은 생각을 압축하여야하는 동기가 되고 이는 생각의 재구성을 요구하며 결국 '두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아니라고? 재고찰이라는 것은 반드시 거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 것은 아닐까'를 두 글자로 줄이기 위한 노력마저도 재고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자의 사용은 발성의 보충을 가져온다. +가 있으면 -도 있는 법이지만 +만 생각해보자. 말로는 하기 힘든 대사가 있다. 문자로 바꾸면 보다 수월한 process가 가능하다. 어째서일까. 각자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중의 멋진 특징으로는 이모티콘이 있을 수 있다. 발성의 억양이 문자의 이모티콘으로 전환된 것이라는 판단도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씀으로 인해 풍성해지는 문자속 감성의 정도는 가히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라 생각한다. 실질적 대화상에서 ♡라든지 ♪를 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줄 간격은 그 여백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음 내용으로의 전환 사이에 자리잡은 하얀 여백의 뒤에 나타나는 것은 내용의 연속일 수도 있지만 어이없는 반전일 수도 있다. 상상의 가능성을 부풀려준다고 할 수 있다.
또 SMS는 시간의 공간적 이용을 가능케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에 대해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feedback을 요구한다. 통화의 경우,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찾아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경우보다 우선 전화를 끊고 책을 찾아 다시 연락을 해 주는 형식을 취할 텐데 이 상황에서 통화가 끊긴 순간 접속시간의 단위가 한번 끊긴 것이고 이것은 일단 시간이라는 공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는 [연락-책찾기-피드백]이라는 하나의 Track이 각 통화라는 수 개의 Session으로 분할되어 운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SMS를 이용한다면 [연락-책찾기-피드백]이 한 세션 내에서 문자가 오고가 opening에서 closing이 완전히 이루어지는데 결국 세션이 트랙의 크기에 맞게 유동적으로 늘었다 줄었다하는 공간적 활용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휴대폰을 내가 어렵게 대하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의무'이다.
기본적으로 스테이션에서의 개인은 전화가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지만(왜냐하면 상대방은 '결과적으로' 그 '영역'에 접속을 시도한 것이지 자신이 원하는 개인에 접속을 시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대폰이라는 자신에의 직접접속수단을 가지게 된 지금에 와서는 상대방의 연락을 받지 않을 경우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고 너의 접속요청에 응하겠다' 라는 의무감을 동반하는데 나는 이 의무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는 만큼 의무는 가중되고 그 만큼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비난받게 될 소지(=확률)도 높아간다.
간단히 말해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만큼 전화를 못 받게 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 약속이라는 것은 상당히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 '연락을 받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확률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무얼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잡상이라는 것은 어디로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구질구질하다. 몇 군데 논리의 오류가 보이는 것이 불쾌하다. 잡상이라는 이유로 넘어가보자.


2002/04/27 01:00 2002/04/27 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