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날 지진이랑 원자력발전소 사태가 일어난 이후 급가속이 붙은 건 사실이지만, 2011년 새해가 밝은 첫날부터 나는 스스로가 박사과정에 진학해야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거의 반년 이상 날 괴롭혀왔던 고민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온 것 같다.
일요일에는 답답하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삶에 대한 답이 안나오기도 해서 바다나 보려고 카사이린카이 공원에 갔다.
방파제 위에 멀뚱히 앉아 바다를 한참 쳐다보고 있자니
"역시... 니가 답을 주지는 않는구나"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리고나서도 그냥 하릴없이 앉아 바다가 방파제를 철썩철썩 때리는 소리를 하염없이 듣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는 박사과정에 진학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다.
그럼 박사과정에 진학함으로써 해결되는 문제와 해결되지 않게 되는 문제.
혹은
답이 나오게 되는 문제와 답이 나오지 않게 되는 문제로 구분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머리가 안따라줘서 못하겠다는 것은 핑계이다. 그냥 내가 공부할 의욕이 없어서 안하고 있을 뿐이지 뭐 어려운거 하고 있는거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3년동안, 그리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싫을것도 없는 과제를 붙들고 씨름하여 박사학위를 얻는 경험은 상당히 소중한 경험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내 마음에 쏙 드는 과제가 아니라 할 지라도.
박사학위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조차 이걸 하면 내가 박사가 된다는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뿌요뿌요처럼 자기 마음대로 비대화하면서 역으로 나를 얽어매는 역효과가 일어난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는 마음먹고 걷어차버리면 되는 일이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주위의 기대까지 다 고려한다 할 지라도 박사학위 그 자체는 나에게 있어 중요한게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과정은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음으로 인해 해결되는 것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
답이 나오게 되는 것과 답이 나오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
지난 반년동안 치열하게 고민하고 위장을 쥐어뜯어가며 고심한 결과.
후자의 사례가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사능 문제는 분명 그 자체로 엄청나게 커다란 덩어리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개의 객체일 뿐인데 그 반대급부로 답이 안나오게 되어 버리는 것은 너무 많고 또 두번 다시 풀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어쨌든 누구라도 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 2011년에 하세가와 연구실에 진학할 수 있는 박사과정 후보가 나밖에 없다면,
문학학사와 공학학사를 동시에 가졌으면서 동경대에서 석사와 박사를 딴 인재가 이온트랩의 기술을 한국에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당위적 이유가 존재한다면,
단순히 나 자신의 하고 싶음, 하기 싫음을 떠나서 나를 아는 누군가가 일본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개체의 가능성이 동아줄을 붙들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어쨌든 존재한다면,
그리고,
나라는 개체의 존재가치가 이 세상에 있어 실은 그리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마도 나는.
책상위에 놓여진 박사학위 신청서류에 사인을 하고 송부하는 행위를 드디어 할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서 한 선택이라는 부분도 존재하니만큼 그 행위가 적극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행해질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내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면
앞으로 3년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그 카드를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모심으로써 다 헤쳐나갈 수 있다.
게다가,
정말 어쩔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다면,
그때가서 때려치는 선택지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맛있는 추어탕 파는 곳 하나 없는 이 팍팍한 도시 도쿄에서 어쨌든 나는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평안을 확보할 수 있다.
시대를 공유할 수 있는 단 한명의 동료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사막같은 도시 도쿄에서.
나는 또 내일을 살아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 Posted
- Filed under 잡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