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일본인론(日本人論)중에서도 루스 베네틱트 여사의 「국화와 칼」과 이어령 교수의「축소지향의 일본인」은 고전의 명저라고 불리우며 당당히 그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세를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아직까지「국화와 칼」을 읽어본 적이 없다. 내가 서평을 위한 두 책 중, 이미 읽어보아서 더 수월하게 평을 쓸 수 있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아니라 구태여「국화와 칼」을 선택한 것은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아직 읽지 못한 이 유명한 책에 접해보기 위함이 첫째이고,「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으면서 느꼈던 일본인, 일본사상에 대한 신선했던 충격을 동급의 명성을 지니고 있는「국화와 칼」에서도 느끼길 바랐기 때문이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국화와 칼」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책의 내용이 일본인들 심리의 깊은곳을 꿰뚫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루스여사는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의 저자인 이어령 씨가 청년기까지의 시절을 일제치하에서 보냈고 일본인들과 함께 살며 일어를 쓰도록 강제되어있던 상황에서 좋든 싫든 일본인들의 문화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득할 수 있었던데 반해 루스여사는 간접사료들만을 인용하여 일본인론에 관한 책을 완성시켰다. 그렇게 쓰여진「국화와 칼」은 과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국화와 칼」은 기본적으로는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통치방법에 대한 참고자료가 필요해진 미국 정부에서 기획하여 용역형식으로 만들어지게 된 책이지만 상당히 다양한 부분까지 손을 대고자 시도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책의 1장은 책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2장과 13장에서 미국의 통치에 있어 참고해야 할 사안들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나머지 장들은 그와는 관련 없이 정말 일본인론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3장과 4장에서는 일본인들이 집단속에서 형성하는 위치에 대해서, 5, 6장은 온(恩)에 대해, 7, 8장은 기리(義理)에 대해, 9장은 정(情), 10장은 가치의 충돌, 11장은 일본인의 자기수양법, 12장은 어린아이들과 그에 관련되는 어른들의 의식세계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그렇다고 각 장이 그리 유기적이지는 않고 한 개의 장 속에서도 주제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이 장별(章別)구분은 그다지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국화와 칼」은 일본인의 언어구조와 실생활로부터 그들의 기저의식을 파악하고자 했던「축소지향의 일본인」과는 다르게 일본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적(現象的) 행동양식으로부터 기저의식을 파악하는 차별화된 구조를 가지고는 있으나 -「국화와 칼」이 먼저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적절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 이 책이 가진 유명세를 생각해보면 사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가장 첫 번째는 이 책의 시점이다. 미국인 문화인류학자 루스 씨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일본인론 집필자라는 신분이다. 그녀는 제 1장에서 이 약점에 대한 방어책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책 전체에 걸쳐 그 약점이 완벽하게 극복되지는 못하고 있다. 루스는 미국에서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일본 관련 자료들의 풍부함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여러 가지 ‘일본의’ 특징들은 사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3장의 내용인 사회적 간격을 유지하는 모습이나 12장의 어린아이를 키우는 모습에 대한 서술에 이르면 동양인 독자로서는 ‘이것이 어찌하여 굳이 일본의 특징을 나타내는데에만 인용되어야 할 사례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루스 여사는 일본인이 가진 일본인만의 특색을 말하기 보다는 미국인이 보는 동양의 특성을 서술하면서 그것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보여지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일본만의 특성이라 지레짐작 해 버리고 논리를 전개시켜간다. 서양인의 눈에서야 자신들과는 확연히 다른 행동양식이 신기하게 느껴졌겠지만 이런 선입관을 가지고 전개시킨 논리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뿐이었다.
두 번째는 참고했던 자료들의 문제이다. 일단은 선정기준이 문제된다. 물론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당시 출판되어 있었던 자료들에도 한계는 있었겠지만 루스여사는 주로 미국, 일본학자들의 자료만을 인용하고 있으며, 내용자체도 미국인과 일본인만을 비교하고 있다. 264p를 보자
『미국인은 ‘보는 나’를 자기 안에 있는 이성적 원리로 간주하고, 위기에 임해서도 빈틈없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행동하는 것을 자랑으로 하는데, 이에 반하여 일본인은 영혼의 삼매경에 몰입하여…….』
『일본인이 이 신조를 표명하고 있는 가장 극단적인 표현은, ‘죽은 셈치고’라는 표현으로……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서구어로 번역하면, 우선 ‘산 송장’ 이라고 하겠는데, 서구 어느나라의 언어에서도 이 ‘산 송장’이라는 말은 혐오의 표현이다…….』
이 표현만이 아니라 동양 어느 나라와의 비교도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은 책 도처에 널려있다. 그렇지만 루스여사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안경을 쓴 당사자가 렌즈의 처방을 알 수 없듯이 일본학자들의 자료에 치우치기보다는, 그리고 자신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시점을 가지고 있을 자국 학자들의 자료보다는 일본의 바로 옆에서 일본을 바라볼 수 있었던 한국이나 중국의 자료를 인용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어야 했다고 본다. 그 결과 실지로「국화와 칼」은 동양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인의 특성과 일본인들만이 가진 일본인들의 특성을 뭉뚱그려 일본인들의 특성으로 서술해 버린 어정쩡한 책이 되고 말았다.
두 번째 문제는 책 서술에 인용한 전체적인 자료들이 현대의 시점에서 참고로 하기에는 시기가 오래되었다는 점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시대가 지나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 언어습관이나 전통의 문화양식들을 가지고 서술한 결과 내용의 영속성(永續性)을 획득할 수 있었던 데 반하여「국화와 칼」은 40~50년대 당시의 일본인들의 행동양태를 가지고 서술한 부분이 서술기반의 주를 이루고 있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수긍하기가 힘든 부분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199p에서는 이런 서술이 있다
『어떤 잡지에서 현대의 한 일본인은 말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결혼의 참다운 목적은, 아이를 낳고, 이에 의하여 집단의 생명을 존속시키는데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이외의 목적은 어느 것이나, 결혼의 참다운 의미를 왜곡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일단 ‘어떤 잡지의 현대의 한 일본인’ 과 같은 모호한 인용대상을 선택한 점은 논외(論外)로 간주하더라도 현대 일본에서의 결혼목적이 아직도 이와 같을지 에는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272p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데,
『일본의 여자들은 아이를 많이 낳기를 바란다. 1930년대 전반의 평균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31.7명인데, 이것은 동부 유럽의 다산국과 비교해보더라도 높은 비율이다. 1940년도 미국의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17.6명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아이를 낳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세의 여자는 다른 연령의 여자에 비해 가장 많이 아이를 낳는다.』
현대 일본과는 전혀 상관없는 데이터가 되어버린 30년대의 데이터를 가지고 해석한 결론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료 선택에서의 많은 문제점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역시 부정확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점일 것이다. 책에 따르면 47, 69, 187, 220, 226, 284p에서 모두 잘못된 자료를 인용하고 있거나 혹은 자료를 잘못 인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된 자료로 전개한 논리가 과연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루스는 1장에서 늘어놓은 장황했던 변명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더욱 부각시키게 되는 함정에 걸리게 된다.
이런 한계들에도 불구하고「국화와 칼」이 일본인론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 해석의 탁월함 때문일 것이다. 1, 2, 13장을 제외한 각 장에서 루스는 외부인이 가지는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핵심에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카스트제도를 도입하여 일본인들이 가지는 적당한 위치를 갖고자하는 마음을 설명했던 3, 4장은 좀 무리한 감도 있지 않았나하고 생각했지만 타인에게 신세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일본인의 심리를 설명한 5, 6장, 표면에 드러나는 명분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심리를 설명한 7, 8장은 저자가 일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수준이 매우 높았고 일본인에게 있어 선과 악의 개념이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10장, 껍질만 남고 사상이 사라진 일본불교를 설명하는 11장에서는 그 경지가 극에 달한 느낌을 준다. 물론 간접자료에 의존하는 한계로 인해 그 이론의 실 적용사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쉽고 또 개발되고 개발된 현재의 일본인론에 비교해보면 부족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시대상과 연구를 위해 준비된 환경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국화와 칼」이 왜 고전의 명저로 손꼽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이 본 일본’을 서술하는 책이나 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말 보편적인 가치를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읽힐 수 있을 만큼의 책은 사실 정말 찾기 힘들다.「국화와 칼」은「축소지향의 일본인」을 볼 때만큼의 만족감을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그 한계를 인지한 상태에서 책을 볼 수 있다면 이 책 또한 나름의 장점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장점은 이윽고 나의 일본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디딤돌로 승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국화와 칼」을 읽기로 선택한 것은 좋은 결정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