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葛孔明
先帝 慮漢賊 不兩立 王業 不偏安 故 託臣以討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賊彊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故 託臣而不疑也
臣 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南 故 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 非不自惜也 顧王業 不可得偏安於蜀都 故 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而議者謂爲非計
今賊 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 乘勞 此 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高帝 明並日月 謀臣 淵深 然 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 不如良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 臣之未解一也
劉繇王朗 各據州郡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 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策 坐大遂幷江東 此 臣之未解二也
曹操智計殊絶於人 其用兵也髣髴孫吳 然 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偪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 僞定一時爾 況臣 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 此 臣之未解三也
曹操 五攻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而李服 圖之 委任夏侯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 臣之未解四也
自臣到漢中 中間朞年耳 然 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郃 鄧銅等 及曲長 屯將七十餘人 突將無前 賨叟 靑羌 散騎 武騎一千餘人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 此 臣之未解五也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蚤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 臣之未解六也
夫難平者 事也 昔 先帝敗軍於楚 當此時 曺操拊手 謂天下已定 然後 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此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 然後 吳更違盟 關羽毁敗 秭歸蹉跌 曹丕稱帝
先帝 慮漢賊 不兩立 王業 不偏安 故 託臣以討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賊彊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故 託臣而不疑也
선제께서는 한을 훔친 역적과는 함께 설 수 없고, 왕업은 천하의 한모퉁이를 차지한 것에 만족해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여기시어 신에게 역적을 칠 일을 당부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으심은 신의 재주를 헤아리시어, 신이 역적을 치는 데에 재주는 모자라고 적은 강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역적을 치지 않으면 도리어 왕업이 망할 것이니 어찌 일어나 치지 않고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그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臣 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南 故 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 非不自惜也 顧王業 不可得偏安於蜀都 故 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 而議者謂爲非計
신은 그 같은 선제의 명을 받은 뒤로 잠자리에 누워도 편안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아니했습니다. 북으로 위를 치려하면 먼저 남쪽을 평정해야 되겠기에 지난 5월에는 노수를 건넜습니다. 거친 땅 깊숙이 들어가 하루 한 끼를 먹으며 애쓴 것은 신이 자신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왕업을 돌아보고, 성도에서 만족해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여겨,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께서 남기신 뜻을 받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게 좋은 계책이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今賊 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 乘勞 此 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이제 적은 서쪽에서 지쳐 있고 동쪽에서도 오나라에게 힘을 다 쓴 끝입니다. 병법은 적이 수고로운 틈을 타라 했으니 지금이야말로 크게 밀고 나아갈 때입니다. 거기에 관해 삼가 아뢰오면 아래와 같습니다.
高帝 明並日月 謀臣 淵深 然 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 不如良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 臣之未解一也
고제께서는 그 밝으심이 해나 달과 같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는 그 슬기로움이 깊은 못과 같았으나, 험한 데를 지나고 다침을 입으시며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비로소 평안하게 되시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곁에서 꾀하는 신하도 장량이나 진평만 못하시면서도 장기적인 계책으로 이기고자 하시며 편히 앉으신 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바로 신이 이해하지 못할 첫번째 일입니다.
劉繇王朗 各據州郡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 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策 坐大遂幷江東 此 臣之未解二也
유요와 왕랑은 모두 일찍이 큰 고을을 차지하여, 평안함을 의논하고 계책을 말할 때는 걸핏하면 성인을 끌어들였으되, 걱정은 뱃속에 가득하고 이런저런 논의는 그 가슴만 꽉 메게 하였을 뿐입니다. 올해도 싸우지 아니하고 이듬해도 싸우러 가기를 망설이다가 마침내는 손권에게 자리에 앉은 채로 강동을 차지하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신이 풀지못한 두 번째 일입니다.
曹操智計殊絶於人 其用兵也髣髴孫吳 然 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偪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 僞定一時爾 況臣 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 此 臣之未解三也
조조는 지모와 계책이 남달리 뛰어나고 군사를 부림에는 손자․오자를 닮았으나, 남양에서 곤궁에 빠지고 오소에서 험한 꼴을 당하며, 기련에서 위태로움을 겪고, 여양에서 쫓기고, 북산에서 지고, 동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야 겨우 한때의 평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하들이 재주도 없으면서 위태로움을 겪지 않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그게 신이 알지 못할 세번째 일입니다.
曹操 五攻昌覇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而李服 圖之 委任夏侯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 臣之未解四也
조조는 다섯 번 창패를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네 번 소호를 건넜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복을 써보았으나 이복이 오히려 죽이려 들었고, 하후에게 맡겼으나 하후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선제께서는 매양 조조가 능력 있다고 추키셨으나 오히려 그같은 실패가 있었는데 하물며 신같이 무디고 재주없는 사람이 어떻게 반드시 이기기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신이 알 수 없는 네번째 일입니다.
自臣到漢中 中間朞年耳 然 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郃 鄧銅等 及曲長 屯將七十餘人 突將無前 賨叟 靑羌 散騎 武騎一千餘人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 此 臣之未解五也
신이 한중에 온 지 아직 한 해가 다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운․양군․마옥․염지․정립․백수․유합․동등과 그 아랫장수 일흔 남짓을 잃었습니다. 언제나 맨 앞장이던
빈수․청광이며 산기․무기를 잃은 것도 천 명이 넘는바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여러 지방에서 모아들인 인재요 한 고을에서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난다면 이들 셋 중 둘은 줄어들 것이니 그때는 어떻게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알 수 없는 다섯번째 입니다.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蚤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 臣之未解六也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할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 (할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은 곧) 멈추어 있으나 움직여 나아가나 수고로움과 물자가 드는 것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함만 못합니다. 그런데도 한 고을의 땅에 의지해 적과 긴 싸움을 하려 하시니 이는 신이 알 수 없는 여섯번째 일입니다.
夫難平者 事也 昔 先帝敗軍於楚 當此時 曺操拊手 謂天下已定 然後 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此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 然後 吳更違盟 關羽毁敗 秭歸蹉跌 曹丕稱帝
무릇 함부로 잘라 말할 수 없는 게 세상 일입니다. 지난날 선제께서 초 땅에서 (조조와의) 싸움에 지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뒤에 선제께서는 동으로 오월과 손을 잡고 서로는 파촉을 얻으신 뒤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가시어 마침내는 하후연을 목 베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조조가 계책을 잘못 세워 우리 한이 설 수 있게 해준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되 뒤에 오가 맹약을 어기매 관우는 싸움에 져서 죽고 선제께서는 자귀에서 일을 그르치시어 조비는 다시 천자를 참칭할 수 있었습니다.
凡事如是 難可逆見 臣 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 所能逆覩也
무릇 일이 이와 같아 미리 헤아려 살피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쓸 뿐 그 이루고 못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신의 총명이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두 번째 출사표를 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