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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ngraejung.co.kr/bbs/board.php?bo_table=board&wr_id=654&page=11글쓴이 : 정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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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지역의 東萊鄭氏 大護軍派 受難史 (己丑獄을 基準으로)
1,己丑獄의 시작
1589년 宣祖 22년 10월1일 壬辰 韓日전쟁이 勃發하기 3년 전 朝鮮王朝 歷史上 가장 치졸하고, 黨爭의(동, 서인의 당쟁) 골이 깊어 발생한 가장 후한 무치한 옥사가 있었으니 바로 己丑獄死다.
東萊鄭氏 大護軍派의 高官大爵을 비롯하여, 全州 인근에 거주하는 우리 一家親戚은 씨가 마르고, 湖南의 대 유학자들이 대부분 치명적으로 피해를 당한 朝鮮開國 이래 가장 피해 규모가 가장 크고 (1000여명의 사망), 우리 家門이 관직을 멀리하게 된 가슴 아픈 사건이다 이사건으로 금구현은 반역향이라 폐지되어
지금의 김제로 편입된 실로 가슴 아픈 있어서는 않될 사건이다
己丑獄은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교생 지함두 등을 문초한 결과 전 홍문관 수찬 鄭汝立이 모반한다는 변서를 올려 己丑年의 옥사가 始作되었다
2,鄭汝立은 누구인가?
鄭汝立은 鄭希曾의 아들이다.정희증의 부는 世完이고 조부는 克良이며,증조는 兵曹判書인 俊이다. 정희증은 명종8년 1553년 文科에 及第하고, 益山縣監을 역임하고 벼슬이 僉正에 이르렀고, 정여립은 조선조 文科榜目에 의하면, 선조3년 1570년 式年試 문과 乙科로 급제 후 弘文館 修撰을 거처 금구현 금산자락 東谷 마을로 落鄕하여 후진을 養成하고 있었다.
鄭汝立은 博學多識하고, 얼굴이 근엄하며, 言辯이 출중하여 논함에 있어 당할 자가 없었다 전해진다. 性格이 과격함은 있었으나, 그리 모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정여립은 문과 등과 후 李珥(율곡)의 학문에 심취하여 전라도 경상도 및 우리가문의 선조 모두가 당시 당쟁에서 東人의 입장에 있음에도 西人인 李珥의 추천을 받아 吏曺 正郞직을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이의 견제로 弘文館 修撰의관직을 받는다.
그러나 정여립은 임진난의 전조를 감지하고 富國强兵을 외치고, 선조의 의유
부단함을 面前에서 직간하고, 한때 따르던 李珥가 死亡하자 李珥의 小人輩 기질을 말하고, 그간에 서인 측면에 있었음에도 西人黨을 배반하고, 東人으로 變身하기에 이른다.
鄭汝立은 노자의 共和思想(大同思想)에 심취하여, 금구현 금산면 동곡 마을로 낙향 후 향촌 무장조직인 大同契를 조직한다. 대동계는 良人 ,賤人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交遊하고 訓練하며, 장차 豫見한 國家 變亂에 對備했다.
또한 1589년 5월 倭寇가 전라도 손죽도에 침입하여 양민을 虐殺하고 재물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전주 부윤 南彦慶은 정여립에게 구원을 要請하기에 이르고, 정여립은 평시 훈련된 대동계원을 동원하여 倭寇를 擊退 한다
조선조의 實錄이 전체적으로 普遍妥當하게 기록되었으나, 中宗實錄, 燕山日記 光海君日記와 더불어 宣祖實錄이 黨派에 의해 偏向된 기록으로 評價 된다
宣祖代의 實錄은 두 종류다 하나는 정사에 가까운 宣祖實錄이고, 다른 하나는 서인당의 입장에서 왜곡된 기록인 宣祖 修正實錄이다.
宣祖實錄에서는 정여립의 평가를 그저 공부하는 士大夫나 博學多識한 人才로 評하나, 西人黨의 주도로 기술된 宣祖修正實錄에는 “전주 근교에 王氣기 있다 그자가 정여립이다” “정여립의 아들 등에 왕자가 있어 玉男이라 했다”“정여립의 집 뽕나무에 말의 갈기가 있다”는 등의 기록을 함으로써 정여립이 본디 모반할 사람이라 낙인을 지우는 것으로 보아 宣祖 修正實錄은 타당하지 아니한 걸로 보인다(당시 민간구전에 뽕나무에 말의 갈기가 나면 그 집에 왕기가 있다는 民間俗說이 流行하고 있었다)
위 사항을 綜合하면 정여립은 당시의 왕권에 도전하기 보다는 老子의 공화사상에 심취하고 이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대동사상을 말하는 등 당시로서는 急進思想을 신봉한 현실에 충실한 선비로 評價 된다
3,己丑獄의 전개과정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을 기준)
1589년 3월2일 황해감사 韓準 안악,재령,신천군수 朴忠侃 李軸 韓應寅 등이 역모의 역당을 잡았는데 그의 주모자가 鄭汝立이다는 변서가 올려지고, 즉시 춘추관 검열 李震吉을 제외 하고(이진길은 鄭汝立의 누이의 아들) 御殿회의를 열어 宣祖가 제신에게 下問하기를 여립이 어떠한 사람인가? 물으니 領相 柳田, 左相 李山海는 “그의 인품을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우상 鄭彦信은 “그가 讀書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알고, 다른 것은 모릅니다”하였다,
선조가 고변內容을 承旨에 전달 읽게 하고 즉시 義禁府 도사 유심에 명하여 고변한 자 와 정여립을 逮捕하라는 명을 하달하고 委官을 우의정 鄭彦信으로 조사를 명했다
동년 10월8일 황해도의 주모자 朴延齡 이광수 이기 등를 압송하였고 심문이 추관 鄭彦信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10월 11일 鄭澈이 상소하여 추관
右議政 정언신이 鄭汝立의 9촌 혈족이라 추관의 수행에 부적절하다며 상소를 올리자, 宣祖는 鄭彦信을 委官에서 削任하고 대신 정철이 委官이 되어 이른바 본격적인 정적의 소탕에 나서고 피비린내 나는 본격 살육이 시작된다.
동년 10월15일 황해도 주모자 이기 이광수을 絞首刑에 처하고,동월17일 안악의 수군 黃彦綸,方義信을 주살한다. 宣傳官 李用濬 진안현감 閔仁伯 등이 鎭安의 竹島를 포위하고 정여립의 生捕에 나섰으나 鄭汝立이 朴延齡을 죽이고, 본인은 자결했으며 그의 아들 정옥남 등을 생포하여 押送했다.(정여립의 자결은 허위이며,증좌을 감추고 철저히 가공의 역모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체포하지 아니하고 즉결 처형시킨 것으로 추정됨)
동년10월19일 玉男을 親鞫하고 자백을 받았고 군기시 앞에서 陵遲處死로 刑을 집행했다
또한 鄭汝立의 屍身에 六失의 刑을 가하고 百官이 序立하게 하였다
이즈음 全羅道 儒生 梁千會가 上疏하여(훗날 정철의 사주에 의해 대신을 모함한 상소로 밝혀져 양천회 및 정철이 처벌됨) 李潑, 李洁,金宇顒,白惟讓,鄭彦信,崔永慶 등이 鄭汝立과 서신교환이 빈번함을 들어 처벌을 논했고,兩司가 彈劾하여 鄭彦信 鄭彦智가 謀主의 族親임을 주장하여 罷職된다.
동년 11월12일에는 鄭楫(정여립의 조카)의 공초에 의해 鄭彦信 鄭彦智 洪宗錄 鄭昌衍 李潑 白惟讓 등을 南海 및 甲山으로 위리안치 및 중도부처 되었다.11월25일부터 鄭汝立과 친한 동지 鄭允福,부교리 宋言愼,장무관 유대정 수원부사 洪可臣등이 파직을 당하고 처벌되는 등 옥사는 擴大되고 있었다.
同年 12월14일 儒生 丁巖壽,朴天挺등이 상소하여 좌의정 李山海,익산군수 이영남 李潑 鄭彦信 전현감 羅士忱 鄭仁弘 韓孝純 李廷立 鄭介淸 鄭彦智 權克禮 權克智 李鎰 洪汝諄 柳永立 金宇宏 李陽元 尹毅中 尹卓然 柳成龍 宋言愼 尹起峷 南彦慶 李彦吉 曹大中 金弘微 李震吉 李弘老 李純仁 柳夢井 등 東人黨 거의 전부를 鄭汝立과 관련자라 처벌을 재차 상소하니 선조가 사건의 확대를 우려하여 丁巖壽 등이 과인을 실험하려 상소했다. 하고 상소한 정암수 등을 문초하여, 사주한 자를 밝히라는 명을 내리기에 이르니, 얼마나 왜곡된 옥사 인가?
同年 12월 16일에는 上疏를 代筆하고 무수한 朝廷大臣을 무고한 私奴 宋翼弼 宋翰弼 형제를 체포하여, 추고하라는 선조의 명이 下達되어 己丑獄死는 수습의 국면에 進入한다.
하지만 宣祖는 우리 大護軍派에 치명적인 명을 내린다 즉 鄭汝立의 祖父 이상의 묘소의 본관을 파내어 移葬시키고 그의 가까운 족인들은 전주가 御鄕(이왕조의 고향)이니 全州에서 거주하지 말라는 명을 내려 우리 家門이 뿔뿔이 흩어지는 離散의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어느 時代이든 사건을 惡用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惡人들이 설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그 대표적인 악인 2명이 全州近郊의 우리族人들을 無差別 학살하니, 그의 이름이 洪汝諄 尹友新이다.
洪汝諄은 전라도 巡察使로 우리 東萊鄭氏 大護軍派의 族人들을 가혹하게 처벌하고 死刑를 가해 死亡者가 數 없이 많았다. 尹友新은 全州 府尹으로 우리 동래정씨 대호군파 일족을 포함 70여명을 죽이니, 희생자의 거의 전부가 우리 大護軍의 一家들이다.
東萊鄭氏 大護軍派 기축옥의 被害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鄭汝立 鄭汝復 鄭汝會 鄭汝興(이상 정여립 형제) 鄭楫(정여립조카)鄭玉男 (정여립의 자) 鄭約 鄭紹 鄭弘李震吉 (이상 정여립조카) 鄭彦憘(정천손 후손) 정여립의 누이 2명 등이 死亡하고, 鄭彦信의 자 鄭慄은 父 鄭彦信의 서간이 없다고(정여립과 정언신간 서간) 말했으나 정언신의 가택수색에서 書簡이 발견되어 鄭慄이 근심하여 식음을 끊고 死亡하였다
또한 流配,囚人은 鄭彦惕 鄭彦悌(이상 鄭千孫 후손) 鄭彦智, 鄭彦信, 鄭思讓(鄭任 후손)鄭協 등이며, 이름없는 우리 大護軍의 族親들이 사망하고, 유배되고, 科擧 應試가 금지되는 등의 고초를 격어야 했다.
4.己丑獄의 再評價 및 結語
기록이 전하는바 己丑獄의 모사 主가 奸渾毒撤 凶人種子翼弼이다(동소만록)
이들을 西人黨이라 부르고, 그것도 모자라 仁祖反正을 통하여 歷史마저 支配하고자 했던 현대의 광주학살 사건이다.
먼저 奸渾毒撤인 鄭撤을 말해보자 누이가 明宗의 後宮으로 궁을 수시로 출입하며 勸力의 속성을 간파한 경기도 일산의 婚戚이다.
우리가 공부한대로 정철은 가사문학을 꽃피운 자로 알고 있지만 思美人曲 續美人曲은 임금에 아부하고 一身榮達을 위한 아부 문학임은 주지의 사실이고, 평소 주사가 심하고 기생을 즐겨하여 鄭彦信등으로 부터 彈劾을 당하여 경기도 파주 일산을 전전하며 東人에 복수할 기회를 虎視耽耽 노리고 있었다.
이런 차에 凶人種子이고 노비출신인 송익필, 한필, 부필, 兄弟의 祖母가 성균관 사예 안당의 종이었다는 사실이 동인인 정언지(예조판서)에 의해서 탈로나 그의 일가 79명이 하루아침에 奴婢로 전락하는 사건이 發生한다
朝鮮의 봉건사회는 逆謀를 고변해야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정철의 東人黨을 참살하려는 의도와 송익필 형제의 奴婢身分을 벗으려는 의도가 일치하여 逆謀를 조작하고 역모를 조작하려는 東人의 適格人物이 평소 과격한 언사를 구사하는 鄭汝立으로 정하고,
己丑獄의 고변을 서인이 지방 관리의 대부분인 黃海道에서 고변하기에 이른다.
奠邑興木字亡의 참설을 사전에 유포시키고,황해도의 무뢰배를 甘言으로 꾀어 고변하게 사전에 約定하고 철저히 각본에 의해 가공의 옥사을 진행한다.
위 사실은 광해군 연간에 李照年(윤원형의 사위)이 저술한 쾌일록에 위 사실이 전해진다
그렇지만 鄭汝立의 子인 鄭玉男, 鄭楫(정여립의 조카)이 逆謀를 자백하고 역모 聯關者를 지목하고, 陵遲處死된 부문을 설명할 길이 난망하다, 하지만 정옥남 정즙의 刑 집행 시, 동인당의 여러 명을 역모자라 끌여 들이면 살려준다 하여, 무고한 대신들을 역모관련자라 끌어 들였는데, 왜 정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라 외치며 능지처사된 점은 철저히 정적의 소탕을 위한 가공의 역모사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평소 조정에 수시로 불만을 토로하고, 老子의 共和思想을 말했던 사실과
나아가 세상은 公物임을 공공연히 말하며, 이를 실천하기위해 大同思想을 설파, 대동계를 조직하여 改革의 실천에 임한 것은, 사실로 봄이 타당하다 하겠다 (필자의 사고 및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즉 己丑獄은 하다만 개혁이고, 시작도 하기 전에 탈로 난 失敗한 改革이고, 개혁의 企劃段階에서 고변되어 실패한 개혁이다.(소설가 김지하의 己丑獄 평가)
그러나 우리역사에서 최초로 共和政을 주장하고 이를 실천할 행동대인 大同契을 결성하여 改革을 실천한 것은 대대로 높이 평가 받아야 함이 타당하다.
후기: 동래정씨 대호군,풍천공, 영상공파,후손으로 조상님의 휘를 존칭 없이 기술 함에 넓은 양해바랍니다. 더불어 조상의 행적을 기술함에 있어 어려움이 많으나
아래의 文獻을 종합하여 위 글을 작성하였음.
朝鮮王朝實錄,(宣祖 및 修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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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鄭汝立(서훈 본명 정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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